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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 구성에 이르기까지
지난 8일 저녁 마지막으로 기사를 점검하고 있던 때, 느닷없이 날아들었던 고애순 씨 태아 사산 사건을 접하고 편집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늦은 시각에도 불구, 이 사건의 경위를 알아보면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고씨와 가족들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듣고 한때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모성애마저 짓밟은 반인륜적인 사건이라는 점과 이를 계기로 여성 수감자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기사화하기로 했다.
사건보도가 나가자 <문화일보>와 <한겨레신문> 등 일간신문들이 이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기 시작했고, 광주지역의 사회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14일 20여 단체는 「고애순 씨 태아사산 및 여성수감자 모성의 권리 보장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대책위의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런지 아직은 정확히 판단할 단계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관심 밖에 벗어나 있는 여성 수감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일정 정도 개선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기를 바란다.
이에 여성 수감자의 교도소 수형생활 문제를 간략하게 짚어본다.
여성재소자 수용시설 태부족
재소자 통계는 국가 2급 비밀로 처리되고 있어 인권단체들이 정확한 실상을 얻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회 국정감사 자료 등에 나타난 통계를 살표보면 그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8월31일 현재 전체 재소자는 총 5만9천3백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중 기결수는 3만2천6백여명, 미결수는 2만6천7백여명이었다. 지난해 5월말 현재 여성 재소자는 3천2백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성재소자는 매년 여성 범죄율이 7% 이상 증가하면서 이에 비례해 늘어나고 있다. 94년 5월말 현재 여성 재소자가 2천5백명인 것에 비하면 1년 사이에 28%나 늘어난 것이다.
법무부와 대검찰청은 여성의 범죄율이 전체 범죄율의 5%이었던 데 반해 2천년까지 15%선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 재소자 수도 그만큼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경향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해 5월 법무부는 6백명 수용규모의 청주여자교도소를 8백명 수용 규모로 늘리기 위해 공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처럼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여성 재소자들을 수감할 곳이 모자라 교도소에서는 수용시설이 아닌 교도소내 교회나 창고 등을 개조해 수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노맹 사건으로 복역중인 은수미 씨가 몸이 아픈 것을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창이 없는 방에 수감되어 있는 것도 수감시설이 부족한 강릉교도소측이 창고를 개조해 수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내 유일의 여자교도소인 청주여자교도소도 마찬가지다. 청주여자교도소는 말이 여자교도소지 사실은 청주보안감호소에 그대로 여성 재소자들을 수감한 것일 뿐 여성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여성재소자들은 신체적, 생리적인 문제로 인해 감옥생활에 남성보다 더욱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광주교도소 재소자 단식
지난해 1월 광주교도소에서는 수감중인 여성 재소자 49명이 3일간 단식농성을 벌인 적이 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접견시간의 보장, 목욕시간 연장 등 처우개선이었다.
당시 함께 단식농성을 했던 최영신(28, 전 광주전남연합 선전부장)에 따르면, “면회시간이 짧아 면회온 재소자 가족들끼리 싸우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목욕도 겨우 10분 정도의 시간에 끝내야 하는 정도였다”며 농성을 했던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생리적인 고통이 더욱 컸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추운 겨울에도 ‘뒷물’을 냉수로 해야 한다든지, 속옷만 입고 자는 여자 사동 심야 근무자가 남자 교도관이라든지 하는 문제 등이 있었다.
농성 이후 교도소측은 복도 등에 마련된 난로에 물을 데워 ‘뒷물’을 하게 해줬고, 목욕시간도 다소 연장했으나, 여성들이 느끼는 수치심은 완전히 해소될 수 없었다고 최씨는 전한다.
지난 89년 방북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90년부터 2년여 동안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임수경(28)씨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말이 여자교도소이지 여성들을 위한 어떤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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