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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에서는 실종.고문.학살 등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으며, 어린이.청소년.난민.선주민 등 소수자들의 인권문제가 심각하다. 지면을 통해 인권침해를 유형별, 계층별로 나눠 12월말까지 격주로 약 20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주>.
몇 년째 귀청을 때려온 ‘세계화’ 구호에 넌더리가 났을 독자들에게 <인권하루소식>에서까지 ‘세계’를 들고 나오는게 어떤 반응을 낳을지 걱정스런 한편 ‘인권’은 좋은 얘기는 제쳐두고 항상 끔찍하고 고통스런 일들만 들춰낸다는 인상을 줄 것이 두렵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글이 둘러볼 ‘세계’는 ‘로맨틱 유럽횡단루트’식의 유쾌한 제목과는 아주 딴판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인권침해’는 너무 흔한 이야기이지만 필요한 만큼 얘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침해자와 탄압자들은 항상 ‘사실’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를 모른 척 하는 일, 아니 아예 모르고 있는 것 자체는 결코 옳은 일이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인종.국적.이념을 넘어, 국내법과 관습을 떠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를 안고 있다. 인권보호는 모든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국경선은 존귀하게 대우받을 인간의 권리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될 수 없을 뿐더러 오늘날의 세계는 얽히고 설킨 한 폭의 천과 같다. 우리가 맞닦뜨린 문제의 상당수는 국제간 상호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유혈과 공포에 대한 ‘인간성의 대응’으로 표현된 세계인권선언은 국제간 상호협력의 경향을 드러낸 초기의 증거물이다.
그러나, ‘모든 민족과 나라를 위해 성취해야할 공통기준’으로서의 선언과 그뒤를 따른 수많은 인권조약들이 그 이행에 있어서 사람들의 ‘절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가안보와 공공의 안전, 범죄예방, 공공질서…”는 항상 그럴듯한 구실이 된다. 그러나 누가, 언제,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기 시작했다고 결정하는가? 국제무대에선 인권의 이상을 담은 명연설을 하고 자기 나라에선 인권침해를 일삼는 위선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나라나 인권의 깃발을 꽂고 항해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도를 해독해 왔다. 동.서간의 해묵은 이분법 - ‘자유’ 지향이냐, ‘보장’ 지향이냐, 정치.시민적 권리가 우선이냐, 경제.사회적 권리가 먼저냐 - 논쟁은 남.북간, 제3세계와 선진국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왔다.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한 자부심에 차서 선진국들은 말한다. “국가의 임무는 가능한 최대한의 자유를 개인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단일정당과 독재로 무슨 발전을 이룰 수 있느냐? 여성과 소수자를 어찌 그리 혹독하게 다룰 수 있느냐? 제3세계의 인권은 말로만 떠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자부심은 종종 ‘위선’으로 조롱받는다. “무기를 파는 건 누구냐? 고문도구를 수출하고 기술을 가르친 건 누구냐?, ‘일자리’가 없는데 4, 5년마다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그리도 좋으냐?”
한편, 제3세계의 반발은 우리에게 익숙한 논법이다.
“우리는 정말 가난하다. ‘생존’이 우선이다. 오믈렛을 먹으려면 달걀을 깨뜨려야 한다. 즉, 일시적인 인권의 손상없이 경제성장의 열매를 먹을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는 때때로 ‘더 큰 선’을 위해 희생되야만 한다. ‘개인의 자유’라는 잣대로 우리를 평가하려들지 말아라. 우리는 ‘개인’보다는 ‘사회 속의 조화와 질서’를 더 중히 여긴다” 등등.
전환점은 가까이 있다. 93년 세계인권대회에 모인 각국 정부와 민간, 남성과 여성은 한 목소리로 합의했다. 인권의 단계에 대한 구시대의 논쟁을 거절하고, 현재 실천해야할 의무이자,미래사회의 관건으로써 정치.시민적 권리와 경제.사회적 권리간의 실제적인 용해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울한 목록들을 펼쳐들어야만 했다. 단 하루도 전쟁과 기아, 자의적 구금과 고문, 강간과 살인, 함께 마련한 선언과 헌장.조약이 끊임없이 손상되고 있음을 확인해야만 한 것이다. 한편 권리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의 화해와 인권존중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 점은 앞으로 연재될 우울한 목록들 앞에서 재확인될 것이고, 뭔가 ‘시작’해야할 때라는 경종이 될 것이다. “행복은 전지구적인 것이여야만 한다. 모두가 누릴 수 있을 때만이 세상은 보다 나은 것이 될 수있다”(Paulo Se´rgio Pinheiro)
【류은숙 인권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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