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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 못지 않게, 영화 <조폭 마누라>가 개봉 5일만에 100만을 동원하며 흥행기록을 깨뜨렸다는 사실은 나를 절망케 한다. 영화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로 이어지는 '깡패 영화' 성공의 대열은 한국이 '깡패 국가'라는 나의 편견을 뒷받침하는 알리바이로 손색이 없는 탓이다. 아무리 코미디로 포장되고, 우정으로 미화되었다 해도 깡패의 은근한 매력에 '넘어가는' 관객의 대열 앞에서 나는 두려움를 느낀다. 여자들이 없는 자리에서, 호시탐탐 깡패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남자들 사이에서, 나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뀐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해 둔감해져버렸지만,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 사회의 폭력성은 쉽게 그 이빨이 드러난다. 얼마전 취재차 만났던 미얀마 이주 노동자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들의 습성으로 '화내는 습관'을 꼽았다. 미얀마에서는 다시 안 볼 사이가 아니면 그렇게 막말을 하지 않는다고, 더구나 손찌검을 하는 일은 깡패들이 아니면 거의 없다고, 그는 전했다. 그가 욕을 입에 달고 살게 된 것도, 술 담배를 배우게 된 것도 3년 동안 한국 사회에 '적응'한 결과다.
지난 9월말, 터키에서 열린 국제평화 세미나에 다녀왔다.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라는 평화운동단체가 주최한 이 회의에서 해외 평화운동가들이 가장 궁금해한 사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던 80년대 한국에서 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설사 손가락을 잘라서 군 입대를 피하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군사주의가 강했던 탓""이라고 답변했다. 벌거벗은 국가폭력 앞에 왜 방어적 폭력이 불가피했는지, 병역의 의무가 얼마나 견고하게 굳어진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는지, 숱한 알리바이들이 떠올랐지만, 나조차 온전히 설득하지 못했다. 끈질긴 자문이 머리 속을 맴돈다. '왜 하나같이 생각조차 못했을까?'. 아무래도 그 혐의는 폭력친화적인 한국 사회의 습속에 가 닿았다. 저항 세력마저 물들여 버리는.
깡패국가를 지명하고, 무한정의를 외치는 미국은 어떤가? 터키에서 만난 미국의 할머니 평화운동가 도리는 ""뉴욕에 20년을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밤거리를 마음 놓고 다녀본 적이 없다""며 ""마치 미국정부가 테러만을 폭력인 것처럼 비난하지만, 미국의 일상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폭력적인 일상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한 미국인의 90%를 넘는 지지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면 과도한 추측일까? 미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아랍이든 폭력에 '지나치게' 민감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깡패국가에서 살아야할지 모른다.
(신윤동욱 씨는 <한겨레21>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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