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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의 의료실태는 너무도 열악하다. 많은 재소자들이 그 피해 속에 살아가고 있다.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지난 6월 23일 강릉교도소에서 출소한 은수미(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 씨의 글을 통해 너무도 반인권적인 의료실태를 되짚어본다. <편집자주>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뿌리깊다. 특히 이것은 교도 행정에서 두드러진다. 일단 구속만 되면 재판 중이어도 무조건 ꡐ죄인ꡑ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간혹 재소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92년 4월 2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5년 2개월의 형기를 치루었다. 그 기간은 한마디로 ꡐ병과의 전쟁ꡑ이었다. 안기부에서의 20일간의 조사와 고문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할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다쳤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다친 허리는 두 달만에 회복되었으나, 10개월쯤 지난 93년 2월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외부 진료 결과 폐렴이 나타날 뿐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대답이었고 나와 가족은 대학병원에서의 재진료를 요구했다. 진료 결과는 일주일간의 입원과 정밀 진단이 필요하다는 진단이었으나 교도소 측의 반대로 결국 정밀 진단은 무산되었다. 또 통증도 자연 완화된 데다가 재판이 끝나 강릉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95년 4월 29일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오른쪽 하복부 통증으로 쓰러졌다. 교도소 의무과에서는 맹장으로 진단하고 외부 병원으로 나를 옮겼으며 외부 병원에서도 맹장으로 판단, 별다른 조사 없이 바로 수술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마취를 기다리며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마취의와 수술집도의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ꡒ이 환자 폐가 나쁜데 마취해도 좋을까?ꡓꡒ 그냥 하래 잖아. 간단한 수술인데 뭘….ꡓ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마취약이 주입되면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이미 6시간이 지나 있었고 중환자실에서 산소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상태였다. 늦게서야 연락을 받은 가족들이 다음날 새벽에 달려와서야 나는 위험한 순간을 넘겼음을 알게 되었다. 복부를 절개하고 보니 어른 주먹만한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당황한 집도의는 교도소 측에 환자의 상태가 안 좋으니 봉합한 뒤 원주의 종합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교도소 측의 거부로 부모의 수술 동의서도 받지 않고 3시간 여의 장절제수술이 실시되었다. 가족들은 개, 돼지도 아닌 인간을 아무리 재소자라 해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다행히 수술경과가 좋은 것으로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집도의는 장절제수술과는 별도로 폐결핵이 의심되니 원주 종합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으라는 진단서를 써 주었다. 하지만 교도소 측에서 불가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 5개월이나 지나 병원에 가보니 완화되었으니 이상 징후가 나타난 후에 다시 와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듬해 96년 4월부터 감기가 계속되더니 급기야 11월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감기약만 받아먹던 나는 종합병원에서의 정밀 진단을 다시 요구하였다. 처음 단순 감기에 무슨 외부진료냐며 반대하던 교도소 측에서는 결국 상태가 악화되자 진료를 허가하였다. 대신 대학병원급이 아닌 의료원에서 이비인후과 조사만 의뢰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나는 일단 어느 곳에서든지 진단을 받아 보자는 마음으로 동의했다. 그 결과 원인 불명의 성대 마비로 평생 목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날벼락 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다시 종합병원에서의 재진을 요구하였고 교도소에서도 허락하여 3개월에 걸쳐 정밀진단한 결과 결핵이 폐에서 후두로까지 번져 성대를 갉아먹었다는 결론이었다. 이것은 95년의 장절제수술도 결핵으로 인한 종양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93년 당시의 폐렴도 결핵의 초기 징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정밀 진단을 받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탓에 일찍 나을 수 있었던 결핵이 악화된 것이다.
은수미(강릉교도소 출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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