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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지낸 벤 브래들리는 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사귀고 있는 친구들을 관찰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친구를 통해 그의 사람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권위를 통해 그를 평가한다. 그래서 혈연, 지연, 학연이 매우 중요시 여겨진다. 혈연, 지연이야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학연 만큼은 후천적인 것이라, 병적인 교육열이 우리사회에 퍼지게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혈연, 지연, 학연은 필수 불가결한 생존도구이기도 하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갈 때도 가족 중 누가 아는 의사를 먼저 찾아가고, 소송을 하려 변호사를 선임할 때도 고등학교 선후배 중에서 고른다. 집을 한 채 지으려 해도 구청에 누가 인연이 닿는 사람이 없으면 왠지 불안해진다. 같은 값을 주고 사는 자동차라도 사돈의 8촌 쯤되는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사야 안심이 된다. 사적이던 공적이던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런 혈연, 지연, 학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혈연 지연 학연의 사회
우리사회가 유별나게 집단의식이 강하게 된 이유 중에는 국가가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 포함된다. 경제개발 지상주의 하에서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야만의 정글과 다름없는 생존경쟁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쟁에서 승리해야 되고, 낙오자들에겐 인간적 존재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국가가 이들의 인격권과 생존권을 보장해주기는 커녕 허약하고 무능력한 사람들로 무시해 버렸다.
국가로부터 개인이 누려야할 권리와 이익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혈연, 지연, 학연이었다. 고향사람이고, 학교선배이고, 먼 친척이라도 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고, 서로 보호해 주는 관습이 정착된 것이다. 물론 연약한 인간들이 힘을 합쳐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집단문화가 왜곡,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주먹세계의 의리
우선 소집단의 가치가 사회전체적인 보편적 가치보다 우선시 되어 왔다. 원칙과 규범에 충실한 사람보다는 인정 많고 의리 있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풍토가 은근히 조성되었다. 인권을 탄압하고 국민을 수탈한 사람이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아랫사람들에게 인정 많은 사람들이라며 추켜세워졌다. 폭력에 대한 비난보다는 주먹세계의 의리가 윤리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우리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은근히 이러한 소집단의 규범을 버리고 대의를 택하는 사람들을 멸시해왔다. 정의와 원칙을 위해 집단의 규범을 일탈한 사람들에게는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제는 이러한 집단문화가 소극적인 집단이익보호의 차원을 넘어 집단이익의 확장으로 번져가고 있다. 몇몇 부류의 집단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배분하며 공존하고 있다. 정부를 운영하겠다며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의지하는 인물들은 그와 정치적인 이념을 같이 하거나 정책수행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이 아니라 친적, 제자, 학교동창, 고향친구, 심지어 고시원 동기생들이다.
이러한 집단들이 우리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주도세력으로서 자리를 잡고 자신들이 장악한 매스미디어를 통해 변질된 집단문화를 우리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정착시키고 있다. 지배이데올로기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 허울을 벗기고 왜곡된 집단문화를 깨뜨리기 보다는 기를 쓰고 그 집단 속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이 기를 쓰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것도 이러한 현상중의 하나이다. 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해주는 사회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해 그 방패막이로 삼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집단문화는 인권보호와 민주화에 치명적인 암세포로 변질되고 말았다.
인권과 집단은 원래 궁합이 잘맞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는 그가 속한 집단과는 무관하게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되면 혈연, 지연, 학연에 의지하지 않아도 편안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장호순(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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