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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한 논리가 세를 얻어가고 있다. 이라크전에 의료병을 파병하는 것은 문제 될 것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전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의료병 파병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이니까 인도적 차원에서도 좋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도 유지하게 되니 최선의 방책 아니냐""고. 심지어 반전 성명을 발표해 간만에 찬사를 받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한 위원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의료병을 파병하는 것은 다르거든요. 개인적 의견이긴 하지만, 의료병의 파병은 의미가 무척 크다고 봐요""라고 말할 땐 정말이지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의료병은 탱크나 미사일로 무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화를 유린하는 침략군대가 아니란 말인가?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점령지에 들어가 미군이 주민들에게 식량과 약을 나눠준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침략군이 아니란 말인가? 과연 '인도적인 침략 군대'라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인가? 정녕 이것이 맞다고 우길 셈인가?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폭격으로 인해 시장판에, 거리에 사람들의 주검이 즐비한 것이 지금 이라크 민중들의 현실이다. 병원에도 폭탄비가 쏟아질까 두려워, 썩어 들어가는 상처에 흐느끼며 병원에도 못 가는 참혹함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5살 미만 어린이 120만 명이 영양실조로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는 유엔의 경고는 이미 이라크의 현실이 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이 미·영 침략군에 의료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퍼붓는 미·영 침략군의 폭격과 12년 동안 지속된 가혹한 경제제재가 이라크 민중들이 겪는 고통의 진정한 이유이지 않은가. 의료병이건 공병이건 무엇이건 간에, 침략전쟁의 지원은 그들의 고통을 더욱 연장시킬 뿐이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는 지금 그 길을 향해 끝끝내 가려고 하고 있다.
침략 전쟁에 동조한 이상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가해자의 위치를 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침략군의 일원을 자처하고서 짐짓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인 양 치장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다시 논의될 내일, 나는 이 땅에 사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국회를 향해 외칠 것이다. 전쟁을 도와 전쟁을 면할 순 없지 않은가. 진정 이라크의 민중들을 죽음의 늪에서 구하고 싶다면,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하고 싶다면, 당장 전쟁을 중지시키는 데 힘써라.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국가들을 향해 '더 이상은 죽이지 말라'고 말하라. 그리고 약과 주사, 그리고 삽은 침략군에게 악세사리로 쥐어줄 것이 아니라, 진정 평화를 일굴 민간단체들과 유엔기구에게 들려주어라.
(이주영 씨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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